갑자기 바다에서...'암살자(들)' 편에 서서 공개 발언한 '영화인들'

“영화를 정치적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라"

정지영·이명세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 20여명이 부산에서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작품에 대한 비판이 정치권의 공방을 넘어 영화제의 작품 선정과 상영 문제, 영화 관계자들의 신상 공개와 신변 위협으로까지 번진 상황에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영화인들은 8일 오전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암살자(들)’을 둘러싼 최근 논란에 대한 공동 입장문을 발표했다. 기자회견에는 정지영·이명세 감독을 비롯해 한재덕 사나이픽쳐스 대표,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김홍준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최근 논쟁이 영화에 대한 평가에 머물지 않고 정치권과 공공기관, 투자기관, 극장과 영화제의 상영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화의 내용이나 역사적 해석을 놓고 찬반 의견을 밝히는 것과 별개로 특정 작품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영화의 상영 여부와 창작자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구분해야 한다는 취지다.

영화 '암살자(들)'

영화인들은 작품을 충분히 감상하거나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전에 영화의 정치적 의도와 성격을 규정하고 감독과 배우, 제작사 등을 새로운 책임의 대상으로 확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영화에 대한 비판 자체를 막자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평가와 정치적 공방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지영 감독은 이날 역사적 사건을 영화로 다루는 창작자의 역할과 관련해 역사에 질문을 던지는 것 역시 예술가의 의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특정 역사 해석에 동의하거나 영화의 완성도를 옹호하기 위한 기자회견이 아니라 영화가 논쟁의 대상이 된 방식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자리라는 점도 강조됐다.

논쟁은 국내 상영을 넘어 해외 영화제로도 번졌다. ‘암살자(들)’은 제37회 싱가포르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는데, 국민의힘은 지난 6일 영화제 측에 개막작 선정을 철회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 109명 전원의 뜻을 모아 보낸 서한에는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논란을 일으켰다는 취지의 주장이 담겼다. 국내에서 시작된 영화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해외 영화제의 작품 선정 문제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싱가포르국제영화제는 7일 공식 입장을 내고 개막작 선정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영화제 측은 ‘암살자(들)’ 제작진의 창작적 비전을 존중하며 예정대로 개막작으로 상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싱가포르국제영화제는 해당 작품이 예술적 성취와 동시대 아시아 영화에 대한 기여를 바탕으로 독립적인 프로그래밍 과정을 거쳐 선정됐다고 설명했다. 제작진이 이 영화를 역사적 사건에 허구의 인물과 상황을 결합한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로 설명해왔다는 점도 언급했다.

이에 대해 국내 영화인들은 해외 영화제의 작품 선정과 상영 결정 역시 해당 영화제의 독립적인 판단 영역이라고 밝혔다. 국내 정치권의 논쟁을 해외 영화제의 독립적인 결정에까지 확대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암살자(들)'의 주연 배우 유해진 / 뉴스1

영화인들은 관객의 판단 영역도 강조했다. 어떤 작품을 영화제에서 선정하고 상영할지는 영화제의 판단이고, 해당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이 결정할 문제라는 입장이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또 하나의 핵심 쟁점으로 제기된 것은 영화 관계자들에 대한 신변 위협이다.

영화인들은 최근 영화 관계자 개인의 신상이 공개되고 주거지와 일상이 침해되는 사례가 발생했으며 협박과 신변 위협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런 행위는 영화에 대한 비판이나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작품에 대한 비판과 창작자 개인을 향한 위협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영화 내용에 동의하지 않거나 역사적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감독·배우·제작진의 개인정보를 공개하거나 주거지를 찾아가는 행위는 같은 범주에서 다룰 수 없다는 취지다.

영화인들은 이번 입장이 ‘암살자(들)’의 진실성이나 완성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분명히 했다. 영화에 반대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찬성이나 반대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작품의 의미와 관객의 판단을 대신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공동 입장의 핵심이다.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은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화는 부산영화제 기간 무대인사 등 관객 대상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관련 일정이 전면 취소됐다.

영화제 측은 관객과 게스트의 안전 및 원활한 행사 진행을 고려한 제작사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영화를 둘러싼 논쟁이 실제 영화제 현장의 행사 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화 '암살자(들)'을 연출한 허진호 감독 / 뉴스1

이번 기자회견에 참석한 정지영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서 사회적·역사적 소재를 꾸준히 다뤄온 감독으로 꼽힌다. 1990년 빨치산의 이야기를 다룬 ‘남부군’을 시작으로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후유증을 그린 ‘하얀전쟁’, 법정 실화를 소재로 한 ‘부러진 화살’, 금융권 비리를 다룬 ‘블랙머니’ 등을 연출했다. 최근에는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소재로 한 ‘소년들’을 연출했다.

이명세 감독은 독특한 영상미와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잘 알려진 영화감독이다. 1988년 ‘개그맨’으로 데뷔한 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 ‘지독한 사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 Duelist’, ‘M’ 등을 연출했다. 1999년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박중훈·안성기·장동건 등이 출연한 액션 영화로, 이명세 감독 특유의 시각적 연출을 보여준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두 감독은 서로 다른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지만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영화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창작물이라는 점과 함께 작품에 대한 비판과 창작자에 대한 위협은 구분해야 한다는 데 한 목소리를 냈다.

‘암살자(들)’은 현재 국내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으며 싱가포르국제영화제에서는 오는 21일 개막작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싱가포르영화제 측은 국내에서 이어진 논쟁을 인지하고 있다고 밝히면서도 작품의 창작적 비전을 존중하고 예정된 상영을 유지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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