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서 약탈, 방화... 또 프랑스가 불타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나 심각하다

공공부문 투자 부족과 고물가에 항의하는 학생·노동조합 시위가 24일(현지시각)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졌다. 정부가 시위 제한령을 내리고 경찰과 헌병 7만명을 투입했지만 수십만 명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프랑스 내무부는 이날 전국 289곳에서 열린 시위에 41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했다. 이 가운데 파리 참가자는 11만명이다. 주최 측인 노동총연맹(CGT)은 파리 25만명 등 80만명 가까이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내무부 추산 55만명이 모인 지난 17일보다는 규모가 줄었다.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24일(현지시각) 시위대가 생뱅상드폴 성당 앞 도로에 설치한 바리케이드에서 불길과 연기가 치솟고 있다. / 르피가로 아크튀알리테(Le Figaro Actualités) 유튜브 영상 갈무리

낮 동안 비교적 평온하던 행진은 오후 늦게 행렬이 흩어지면서 거칠어졌다. 파리에서는 행진 막바지에 복면을 쓴 시위자들이 경찰을 향해 물건과 폭죽을 던졌다. 경찰은 최루가스와 섬광음향탄, 물대포로 맞섰다. 경찰이 젊은 시위자들에게 최루가스를 뿌리거나 곤봉을 휘두르는 모습도 목격됐다. 거리 곳곳에서는 자전거와 스쿠터가 불탔다.

프랑스 파리 뱅센 거리에서 24일(현지시각)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한 가운데 거리 곳곳에 연기가 퍼지고 있다. / '르피가로 아크튀알리테' 유튜브

충돌은 행진 종착지인 포르트 드 뱅센에서 가장 거셌다. 오후 5시께 행진이 끝나고 군중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과격 시위자 500여명이 경찰 차량 저지선을 뚫으려 했다. 이들은 검은 후드와 헬멧, 고글, 방독면으로 무장했다. 상점들이 약탈에 대비해 세워둔 대형 합판을 뜯어와 물대포를 막는 방패로 삼기도 했다. 바닥에 떨어진 최루탄 통을 경찰 쪽으로 걷어차거나 각목 조각을 던지는 모습도 보였다. 일부 방송 취재진은 이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경찰이 저항하는 시위자를 붙잡아 끌고 가려 하자 다른 시위자들이 달려들어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24일(현지시각)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경찰이 불타는 바리케이드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 'CNEWS' 유튜브

방화와 약탈도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포르트 드 뱅센 일대에서는 아우디 매장 유리창이 깨졌다. 시위대는 가로수와 쓰레기통에도 불을 붙였다. 마르세유 도심 곳곳에서는 바리케이드가 불탔다. 그르노블에서는 피자헛 매장과 슈퍼마켓이 약탈당했다. 낭트에서는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보석상 한 곳도 털렸다.

로랑 뉘녜즈 내무장관은 시위와 관련해 1000명 가까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그는 체포 인원이 더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뉘녜즈 장관은 행렬 뒤편에서 '폭도' 500명가량이 2시간 동안 경찰과 마찰을 빚었다고 전했다. 그는 "검은 복면을 쓴 극좌 세력이 폭력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만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은 지난주보다 크게 누그러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파리 등지에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학생들의 만성절 방학까지 겹쳤다. 우려했던 대규모 소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경찰은 시위 시작 전부터 대대적인 검문에 나섰다. 파리에서만 3000건 넘는 검문이 이뤄졌다. 전국적으로는 오전부터 135명이 체포됐다. 압수품에는 금속 구슬과 납탄, 폭죽, 새총, 흉기, 비비탄총, 방독면, 절단 공구, 곤봉 등이 포함됐다. 뉘녜즈 장관은 툴루즈와 클레르몽페랑에서 1명씩 중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부상 경위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현지 언론은 툴루즈 부상자의 손가락이 절단됐다고 보도했다.

24일(현지시각) 프랑스 서부 낭트에서 시위대가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프랑스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예고된 가운데 낭트에서는 물대포와 장갑차량이 배치되는 등 긴장이 고조됐다. / 'CNEWS' 유튜브 영상 갈무리

이번 시위는 삼엄한 경비 속에 치러졌다. 투입된 경찰과 헌병은 지난주보다 20% 늘었다. 상공에는 헬기가 돌았다. 거리에는 장갑차가 늘어섰다. 경찰 특수부대 RAID도 지원 임무에 투입됐다. 대테러 작전 '상티넬'에 동원된 군인들은 일부 공공건물을 지켰다. 대통령 집무실인 엘리제궁 등 주요 거점에는 장갑차와 무장 경찰이 배치됐다. 드론도 공중 감시에 동원됐다. 파리에서는 지하철역 최소 24곳이 문을 닫았다.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세미술관도 이례적으로 휴관했다. 아트바젤 파리는 주말 행사를 모두 취소했다. 파리 도심 상점들은 진열창에 나무판을 덧댔다. 생라자르역 인근 안경점에 판자를 설치하던 아크람 아메드(34)씨는 가게 주인이 절박해 보였다고 말했다.

24일(현지시각) 프랑스 서부 낭트에서 시위대가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프랑스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예고된 가운데 낭트에서는 물대포와 장갑차량이 배치되는 등 긴장이 고조됐다. / 'CNEWS' 유튜브

시위 경로를 두고도 갈등이 불거졌다. 파리 경찰청은 당초 바스티유 광장에서 나시옹 광장까지 노조 행진을 허용했다. 그러나 막판에 안전을 이유로 경로를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남동부 포르트 디탈리에서 포르트 드 뱅센까지로 바꿨다. 행정법원은 노조의 이의 신청을 기각했다. 노조 연합은 정부가 "진정이 아니라 무질서의 조건을 만들고 있다"고 반발했다. 뮈리엘 길베르 연대노조(Solidaires) 공동대표는 시위대가 원하는 곳에서 시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짓"이라고 비판했다. 교육계에서 은퇴한 모니카씨는 정부가 "운동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 한다"고 꼬집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앞서 허가받은 노조 시위 외의 모든 시위를 금지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리옹과 니스, 몽펠리에, 루앙 등에는 시위 금지령이 내려졌다. 부슈뒤론 지역에서는 인구 1만명이 넘는 도시의 시위가 일부 예외를 빼고 모두 금지됐다. 마르세유에서는 시위 1건만 허용됐다. 마르세유와 오바뉴 등에는 야간 통행금지령이 유지됐다. 인권단체들은 표현의 자유 침해라며 금지령을 비판했다.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24일(현지시각)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경찰이 불타는 바리케이드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 'CNEWS' 유튜브 영상 갈무리

금지령에도 여러 도시에서 시위대가 몰렸다. 시위가 전면 금지된 리옹에는 약 1만명이 모였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도심을 돌며 시위를 강행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던져 군중 해산에 나섰다. 한 21세 학생은 "경찰이 정말 기동성 있게 움직인다"며 "시위대가 모이기도 전에 해산시키러 온다"고 말했다.

낭트에서는 루아르강 다리를 건너 시위 금지 구역으로 들어가려던 시위대를 경찰이 물대포로 막았다. 일부 시위자는 경찰을 향해 작은 물체를 쏘며 맞섰다. 마르세유에서는 경찰 추산 1만7000명, 주최 측 추산 10만명이 행진했다. 니스에서는 극우 세력이 시위대와 몸싸움을 벌여 11명이 체포됐다. 경찰 추산 2만6500명이 모인 툴루즈에서는 한 시위자가 최루가스 통을 발로 걷어차는 모습이 포착됐다. 스트라스부르와 보르도, 릴, 그르노블 등지에서도 경찰이 최루가스와 물대포를 썼다. 보르도에서는 폭우 속에서도 수천 명이 행진했다.

프랑스에서 24일(현지시각) 대규모 시위가 열린 가운데 시위대가 거리에서 깃발을 흔들고 있다. 프랑스 내무부는 시위 참가자를 약 41만명으로 집계했으며, 노동총동맹(CGT)은 80만명 이상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 르몽드 유튜브

거리에 나선 이들의 목소리가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파리의 고등학생 시몽(17)은 "모든 고등학생에게 똑같은 교육 자원이 주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툴루즈의 고등학생 엘라(17)는 "요즘엔 시위에 나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두렵다"며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교사 베네딕트 피티옹(46)은 딸 가랑스 피티옹(16)과 함께 행진했다. 그는 "시위에 나선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외면당했다"며 "부모로서, 교사로서 그들 편에 선다"고 말했다. 가랑스 피티옹은 지난주 폭력 사태 뒤 몹시 무서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집에 머무는 것은 정부에 승리를 안겨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CGT 조끼를 입은 간호사 수마야 아베드(58)는 30여년간 노조 시위에 참여했지만 도심이 아닌 외곽을 행진하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아베드는 "정부가 지난주 일을 시위대 입에 재갈을 물리는 데 이용하고 있다"며 "그래도 운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더 나은 학교를 요구하는 학생들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카미유 셰스니에(27)는 같은 처지의 사람이 넘쳐난다고 토로했다. 그는 거리나 무단 점거 건물에서 지내는 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루이 르두크사타르씨는 "인구의 일부는 모든 것을 갖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이렇게 자주 거리에 나설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덧붙였다.

시위자들은 "우리가 타면 당신도 함께 탄다", "지구가 불타고 우리의 미래도 함께 불탄다", "이제 지긋지긋하다" 등의 문구를 들었다. "억만장자가 너무 많다, 우리는 혁명을 준비한다", "우리는 모두 반파시스트다"라는 구호도 터져 나왔다.

프랑스 파리 뱅센 거리에서 24일(현지시각)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한 가운데 거리 곳곳에 연기가 퍼지고 있다. / '르피가로 아크튀알리테' 유튜브 채널 영상 갈무리

이번 시위는 지난달 중순 파리 남동부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 부족에 항의하며 시작됐다. 학생들은 낡은 학교 건물과 교사 부족, 불공정한 대학 입시 제도에 반발해 학교를 봉쇄했다. 연료비 등 생활비 부담을 호소하는 노동자들과 2018년 '노란 조끼' 운동 참여자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학생들은 10개 요구안을 내놓았다. 요구안에는 대학 정원 25만명 확충과 대입 지원 플랫폼 '파르쿠르쉽(Parcoursup)'의 선발 폐지, 교사 증원, 학교 시설 보수 등이 담겼다. 학생 장학금 월 200유로 인상과 공공 학생 기숙사 임대료 동결도 요구했다. 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에 따르면 지난달 에너지 가격은 1년 전보다 21.3% 올랐다. 이 여파로 전체 물가상승률은 3.1%를 기록했다.

지난 17일 시위는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되다 약탈과 기물 파손으로 번졌다. 수천 곳의 상점이 부서지거나 털렸다. 공식 집계로 2000명 넘게 구금됐다. 리모주에서는 1883년 문을 연 시청 건물이 불에 탔다.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총리는 이번 시위를 앞두고 "위협 수준이 여전히 높다"며 극좌 세력과 범죄 조직의 위험을 경고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전날 시위 사태 이후 처음으로 고등학생 대표들을 만났다. 마크롱 대통령은 교사 증원과 파르쿠르쉽의 전면 개편을 약속했다. 그러나 학생 대표들은 정부가 구체적 조치를 내놓을 때까지 시위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정치권도 들끓었다. 장뤼크 멜랑숑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대선 후보는 이날 파리 시위에 참여해 "마크롱은 이 시위가 매주 되풀이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멜랑숑 후보는 일부 10대 시위자가 평생 남을 부상을 입었다며 경찰의 진압 방식을 비판했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은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국민연합은 유권자들에게 마린 르펜 국민연합 대선 주자를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국민연합 전당대회가 열린 오를레앙에서는 반극우 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1만3000명이 참여했다고 집계했다. 주최 측은 2만6000명이 모였다고 밝혔다. 시위대는 "마크롱 사임, 르펜 감옥행"을 외쳤다. 현수막에는 "청년들은 국민연합에 '꺼지라'고 말한다", "파시스트보다 뜨겁다"는 문구가 적혔다. 소피 비네 CGT 위원장은 "국민연합은 인종차별적이고 위험한 정당"이라고 말했다. 올리비에 포르 사회당 대표는 "인종차별의 일상화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국민연합은 이날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를 99%에 가까운 득표율로 재선출했다. 르펜 대선 주자와 바르델라 대표는 25일 지지자 약 1만명 앞에서 대선 캠페인을 시작할 예정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3연임이 금지돼 다음 대선에 나설 수 없다. 프랑스 대선은 내년 5월 치러진다. 여론조사에서는 르펜 대선 주자가 큰 격차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노란 조끼 운동 측은 오는 31일 추가 시위를 예고했다. 이 단체 관계자는 바스티유 광장에서 "시위할 자유, 우리 모두의 자유를 위해 시위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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