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 밖으로 나온 백제 왕비…공산성의 밤이 무대가 됐다 [TF현장]


공산성 성안마을서 첫 선...공산성 밤숲에 내려앉은 1500년 전 왕비의 시간
'저승길' 따라가자 빛과 음악이 말을 걸었다


4일 오후 7시 공주시 공산성 성안마을에서 새롭게 선보인 야간 실경공연 ‘접경: 왕비가 건넌 밤’이 공연되고 있다. /김형중 기자

[더팩트ㅣ세종=김형중 기자] 4일 오후 7시 충남 공주시 공산성 성안마을. 해가 완전히 지자 낮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밤의 공산성이 서서히 모습을 바꿨다. 어둠 속 숲 사이로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관람객들의 시선이 무대가 된 수풀과 비탈진 지형으로 모였다.

잠시 후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은 없었다. 대신 느린 몸짓과 음악, 빛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1500년 전 백제의 왕비가 남편 무령왕을 만나기 위해 저승길을 건너는 여정이었다. '저승길' 따라가자 빛과 음악이 말을 걸었다

제72회 백제문화제에서 처음 선보인 야간 실경공연 '접경: 왕비가 건넌 밤'이 이날 공산성 성안마을을 무대로 관람객을 만났다. 무령왕비 서거 15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 공연은 무대 세트를 따로 만들기보다 세계유산 공산성의 실제 숲과 지형을 그대로 공연장으로 활용했다.

공산성 성안마을에서 선 보인 야간 실경공연 ‘접경: 왕비가 건넌 밤’ 장면. /김형중 기자

말 대신 몸짓…빛과 음악으로 되살린 '왕비의 밤'

공연이 시작되자 배우들은 대사 한마디 없이 몸짓만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무대 위 배우와 관람객 사이에 놓인 것은 거대한 장치가 아니었다. 공산성의 나무와 숲, 어둠 그리고 빛이었다.

청동거울과 은잔배, 원형 프레임 등 상징적인 오브제가 등장할 때마다 공연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조명은 배우의 움직임을 따라 숲을 비췄고, 음악은 깊은 밤의 공산성을 채웠다.

관람객들은 공연장 곳곳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한곳에 설치된 무대를 바라보는 기존 공연과 달리 배우들이 실제 지형을 오가며 연기를 펼치면서 관람객 역시 공연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어둠 속에서 펼쳐진 미디어 연출과 조명은 공산성의 역사적 공간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수풀 사이로 빛이 번지고, 배우의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1500년 전 백제의 시간이 현재의 공산성 위에 겹쳐지는 듯한 장면이 연출됐다.

공산성이 무대가 되자…'역사'가 아닌 '경험'이 됐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공산성을 단순한 배경으로 소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유산 공산성이 공연의 무대이자 이야기의 일부가 됐다. 관람객들은 객석에 앉아 백제 역사를 설명 듣는 대신 밤의 공산성을 직접 걸으며 왕비의 여정을 지켜봤다.

야간 실경공연 ‘접경: 왕비가 건넌 밤’ 장면. /김형중 기자

무령왕비가 저승길의 문을 통과해 남편 무령왕을 향해 가는 서사는 공산성의 밤이라는 공간과 만나면서 한층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관람객들 사이에서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쉽게 자리를 뜨지 않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곳곳에서 "생각보다 훨씬 몰입감이 있다", "공산성에서 이런 공연을 보니 색다르다"는 반응이 나왔다.

공주시가 이번 공연을 백제문화제의 새로운 야간 콘텐츠로 내놓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낮에 역사유적을 둘러보는 관광에서 벗어나 밤까지 공주에 머물게 하는 체류형 관광 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다.

새롭게 선 보인 야간 실경공연 ‘접경: 왕비가 건넌 밤’의 한 장면. /김형중 기자

"공주의 밤을 대표하는 콘텐츠로"…5일 두 차례 추가 공연

공주시는 이번 공연을 계기로 공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활용한 야간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발굴한다는 계획이다.

최원철 공주시장은 "올해 처음 선보인 공산성 실경공연 '접경: 왕비가 건넌 밤'은 무령왕비의 숭고한 여정을 현대적 감각의 악·가·무로 풀어낸 수작"이라며 "앞으로도 백제문화제의 정체성을 살린 품격 있는 신규 콘텐츠를 통해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 공주의 매력을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접경: 왕비가 건넌 밤'은 5일 오후 7시와 오후 8시 30분 두 차례 추가 공연을 이어간다.

가을밤 공산성. 1500년 전 백제 왕비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는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다시 한 번 어둠 속 성안마을로 향한다. 역사책 속에 머물던 백제의 이야기가 이날 밤만큼은 숲과 빛, 음악과 사람의 몸짓을 통해 현재의 공주에서 다시 살아났다.

실경공연 ‘접경: 왕비가 건넌 밤’ /김형중 기자

tfcc202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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