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찢긴 '한글'지 다시 붙여 읽었다…순천이 기억해야 할 한글학자 송병수


한글날 100주년·훈민정음 반포 580주년 기획

순천시의 한글학자 아보(雅步) 송병수(1919~2002) 선생은 평생 한글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삶 속에서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박옥임 전 순천대 교수(송병수 선생 며느리)

2026년은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이자 한글날 100주년이다. 우리가 매일 읽고 쓰는 한글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에 놓인 문자가 아니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는 수많은 사람의 연구와 노력, 그리고 지키려는 의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더팩트>는 한글날 100주년을 맞아 자신의 삶터에서 우리 말과 글을 지켜온 전남광주 순천시의 한글학자 아보 송병수(1919~2002) 선생을 조명한다. 일제강점기 경찰이 찢어버린 '한글'지를 다시 붙여 읽었던 그는 자녀와 손주의 이름을 토박이말로 짓고, 족보와 순천의 지명까지 한글로 기록하며 평생 우리말을 삶으로 실천했다.[편집자주]

[더팩트 l 순천=김영신 기자] 자녀이름, 족보, 순천의 지명까지 한글로 기록한 순천의 한글학자.

1991년 제1회 한글학회 '세종임금기림상' 수상과 1994년 한글학회 공로 표창.

아보 송병수 선생(1919~2002) 이야기다.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이자 한글날 100주년이다. 한글의 역사와 가치를 되새기는 해이지만 정작 지역에는 평생 한글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삶 속에서 실천했던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순천시의 한글학자 아보(雅步) 송병수 선생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의 잡지 '한글'을 구해 읽었고, 경찰에게 찢기고 짓밟힌 잡지를 다시 주워 보관했다. 광복 이후에는 우리말 문법과 한글 풀어쓰기를 연구했고, 자녀와 손주, 증손주의 이름을 우리말로 지었다.

족보를 한글로 기록하고 순천의 지명 유래를 연구했으며, 자신이 1회 입학생으로 다녔던 학교의 설립자 김종익 선생을 기리는 비문의 글까지 남겼다.

한글을 연구한 학자였지만 그의 한글은 책 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글은 그에게 가족의 이름이었고, 지역의 역사였으며, 제자들에게 가르친 언어였고, 순천이라는 도시의 기억을 기록하는 수단이었다.

◇1930년대, 찢긴 '한글'을 다시 주워 담다

10대 시절 조선어학회에 편지를 보내고 회보와 잡지 '한글'을 받아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송병수 선생의 한글 사랑이 시작됐다. 조선어학회가 발행한 '한글' 일부. /박옥임 전 순천대 교수(송병수 선생 며느리)

송병수 선생의 한글 사랑은 10대 시절 시작됐다.

광양 옥룡보통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교사 송재철에게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전해 들었다. 이후 조선어학회에 편지를 보내고 회보와 잡지 '한글'을 받아보기 시작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던 시기였다. 경찰은 그가 받아보던 '한글'을 문제 삼았다. 잡지를 바닥에 내던지고 짓밟는 일도 있었다. 어느 날에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잡지를 칼로 찢게 했다. 그러나 경찰이 돌아간 뒤 송병수는 찢어진 잡지를 다시 주워 모았다.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

훗날 가족들이 그의 서재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것은 단순한 오래된 책들이 아니었다. 종이로 싸고 끈으로 묶어 보관한 '한글'을 비롯해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조선어학회 관련 자료와 한글 자료들이 남아 있었다.

한글을 지키는 일이 곧 자신의 삶을 지키는 일이었던 셈이다.

◇광복 뒤에도 멈추지 않은 한글 연구

평생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순천시의 한글학자 아보 송병수 선생은 1991년 제1회 한글학회가 주최한 '온 겨레 한말글 이름 큰잔치'에서 '세종임금기림상' 수상과 1994년 한글학회 공로 표창을 받았다. /박옥임 전 순천대교수(송병수 선생 며느리)

1945년 광복 이후 선생의 한글 연구는 교육과 연구로 이어졌다. 그는 순천사범학교를 비롯해 순천농전(현 순천대학교), 순천매산고, 순천효천고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5년 9월 국어교사가 된 뒤 46년 동안 교단에 섰다. 그가 관심을 둔 분야는 우리말 문법과 한글 표기였다.1959년에는 이강국·김계곤과 함께 학교 문법 체계 문제를 다룬 공개토론 기록을 남겼고, 순천 지역의 지명과 읍호의 변천을 연구해 1997년에는 '순천 지역의 지명 연원과 읍호의 변천'을 발표했다.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풀어 쓰는 '풀어쓰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낱자의 글자꼴과 이름을 연구하고 자신만의 표기 체계를 고민했다. 문법 용어도 우리말로 바꾸려 했다.

명사는 '이름씨', 대명사는 '대이름씨', 동사는 '움직씨', 형용사는 '그림씨', 관형사는 '매김씨', 부사는 '어찌씨'라고 불렀다.

한글을 단순히 보존해야 할 문자가 아니라 누구나 쉽게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언어로 바라본 것이다.

◇자녀 이름부터 우리말로 지었다

그의 한글 사랑은 가족의 이름에서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1948년부터 자녀들에게 이정이, 어지니, 열리미, 언더기, 움지기, 송송이 등 토박이말 이름을 지었다. 당시만 해도 한자 이름이 일반적이던 시대였다.

손주와 증손주에게도 같은 원칙을 이어갔다. 손주 이름은 가라모, 길마로, 거름수, 그라메, 커다모 등으로 지었고 증손주에게는 내소리, 내벼리, 누미르, 누리하, 나이루, 나리라 등의 이름을 붙였다.

이름을 통해서도 우리말을 생활 속에서 이어가겠다는 그의 생각이 드러난다. 오늘날에는 '순우리말 이름'이 낯설지 않지만 송병수 선생이 자녀들에게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1940년대 후반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족보까지 한글로…여성 조상 이름을 되살리다

선생의 한글 연구에서 특히 눈에 띄는 작업은 족보였다.

그는 1985년 7년간의 작업 끝에 '여산송씨 가승보'를 한글로 펴냈다. 족보에 기록된 조상들의 이름을 단순히 한자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 고조할머니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여성 조상들의 이름을 찾아 기록했다. 당시 족보에는 남성 중심으로 기록되고 여성의 이름은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여성 조상들의 이름과 계보를 되살려 기록하면서 한글 족보의 의미를 넓혔다. 한글을 단순히 한자를 대신하는 문자로 본 것이 아니라 기록에서 소외됐던 사람들의 이름과 삶까지 남길 수 있는 문자로 바라본 것이다.

한글학자 허웅 선생은 송병수 선생의 한글 족보를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한글 족보의 첫 사례로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순천의 지명도 연구했다…지역사를 우리말로 기록

선생의 관심은 가족과 언어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순천의 지명과 지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97년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에 '순천 지역의 지명 연원과 읍호의 변천'을 발표한 것도 이 같은 관심의 결과다. 백계산 옥룡사 선각국사 도선의 비명 등 지역의 역사 자료도 연구했다.

지역의 지명을 단순히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그 이름이 어디에서 비롯됐고 어떤 역사적 배경을 품고 있는지를 살폈다. 한글 연구가 지역사 연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자신이 다닌 학교 설립자 김종익 선생의 비문도 썼다. 송병수 선생의 삶을 순천의 교육사와 연결하는 또 하나의 흔적이 있다. 1935년 설립된 순천공립농업학교(현 순천대학교)에 그는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갔다. 학교를 세운 사람은 우석 김종익 선생(1886~1937)으로, 선생은 지역의 교육 기반을 만들기 위해 순천공립농업학교를 설립했다.

'미래에 투자하여 생리(生理, 사는 도리)를 열음이여 멀고 긴 눈으로 세대를 살찌우다.' 현재 순천대학교 교정에 있는 김종익 선생의 기념비에는 송병수 선생이 직접 쓴 글이 남아 있다. 한글학자가 자신의 스승과도 같은 학교 설립자를 기리는 글을 남긴 것이다. 이 한 문장은 선생의 삶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가 평생 관심을 기울인 것은 과거의 문자를 보존하는 데만 있지 않았다. 우리말을 통해 다음 세대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더 가까웠다.

김종익 선생이 학교를 세워 미래 세대를 길렀다면, 송병수 선생은 우리말을 가르치고 기록해 다음 세대에 남기려 했다.

순천대학교 교정에 남은 짧은 비문은 두 사람의 삶을 연결하는 흔적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권재일 명예교수가 다시 조명한 '아보 송병수'

송병수 선생의 우리말 사랑은 지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최근에는 국내 국어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인 권재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교수가 송병수 선생의 삶을 다시 조명했다.

한글학회가 발간한 '한글 새소식' 2026년 8월호(제648호)에는 '우리 말글을 빛낸 인물' 코너에 '아보 송병수 선생의 우리 말글 사랑'이라는 권재일 교수의 글이 실렸다.

권재일 교수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교수로, 국립국어원 제8대 원장을 지냈다. 국어 문법과 역사언어학을 연구해 온 학자다. 그런 권재일 교수가 한글학회 지면을 통해 송병수를 '우리 말글을 빛낸 인물'로 다시 소개했다는 점은 의미가 작지 않다.

선생의 연구가 단순히 한 지역 인사의 개인적인 한글 사랑에 그치지 않고 우리말과 글을 지켜온 인물들의 역사 속에서 다시 조명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히 송병수 선생의 자료와 업적은 한글 연구와 교육, 가족의 이름, 족보, 지역 지명과 역사 기록으로 이어진다. 한글을 연구한 사람이라기보다 한글을 삶의 방식으로 실천한 사람에 가까웠던 이유다.

◇46년 교단에서 가르친 한글…932쪽에 담긴 한 사람의 삶

선생의 삶과 연구는 지난해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면서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의 서재에서 발견한 자료와 생전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가족들은 오랜 시간 정리 작업을 이어갔다. 이 자료들은 며느리인 박옥임 전 순천대 교수의 손을 거쳐 4년여만에 '아보 송병수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무려 932쪽에 달하는 이 책에는 선생의 생애와 교육활동, 한글 연구, 지역사 연구, 가족에 대한 기록 등이 담겼다. 지난해 10월 순천대에서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그가 남긴 자료에는 한글을 연구한 학자와 교사, 지역사 연구자,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여러 모습이 남아있다.

자녀의 이름을 우리말로 짓고, 족보에서 여성 조상의 이름을 찾아냈으며, 순천의 지명을 연구했다. 또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학교를 세운 김종익 선생을 기리는 비문에도 우리말과 미래 세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한글을 연구한 사람에서 한글로 살아간 사람으로

서재에서 발견한 자료와 생전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가족들은 오랜 시간 정리 작업을 이어갔다. 며느리인 박옥임 전 순천대 교수의 손을 거쳐 4년여만에 '아보 송병수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박옥임 전 순천대 교수(송병수선생 며느리)

선생이 남긴 것은 거창한 기념비만은 아니다. 찢긴 '한글'을 다시 주워 보관했던 한 권의 잡지, 우리말로 지은 자녀들의 이름, 수년간 매달린 한글 족보, 순천의 지명을 기록한 논문, 그리고 순천대학교 교정에 남은 짧은 비문이 그의 삶을 말해준다.

지난해에 열린 선생의 탄생 106주년 출판기념회에서 선생의 가족과 제자들은 "선생님은 늘 한글은 우리가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자,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여는 창이라고 하셨다"며 "제자들을 대하실 때면 눈빛은 언제나 온화하셨고, 후학들의 글을 읽으며 ‘글은 마음의 거울’이라 하시며 언어의 겸손을 가르치셨다"고 선생을 추모했다.

◇한글날 100주년 기념일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아보 송병수' 선생

찢겨도 다시 주워 읽었던 '한글'에서 시작해 가족의 이름과 족보, 순천의 지명과 교육의 역사까지 기록했던 사람. 고조할머니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선대 여성들의 이름을 찾아서 기록하고 이들의 친정 직계자손과 고모 쪽의 직계까지 밝혀 낸 혁신적인 족보를 한글로 편찬해 낸 사람 아보 송병수 선생.

그가 '아보'라는 호를 사용한 것도 자신이 지향했던 삶과 맞닿아 있다. '아끼고 보살피자'는 뜻을 담았다. 우리말을 아끼고 보살피는 일 역시 그가 평생 실천했던 삶의 한 방식이었다.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 한글날 100주년을 맞아 한글의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 전국적인 기념행사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고 선조들이 지켜온 문자이지만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한 사람들의 흔적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졌다. 그 이름 가운데 순천의 송병수 선생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보 송병수 선생은 한글을 연구한 학자이면서 한글로 자신의 삶과 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순천의 한글학자였다.

bbb250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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