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거주한다고 재계약 거절 뒤 재임대…대법 "세입자에 배상"


대법 "예측 못 한 불가피한 사정 있어야" 첫 판단

실거주를 이유로 세입자의 계약갱신 요구를 거절한 집주인이 당초 계약이 갱신됐을 기간이 끝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집을 임대했다면,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기존 세입자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더팩트 DB

[더팩트ㅣ선은양 기자] 자신이 실거주해겠다며 세입자의 계약갱신 요구를 거절하고 2년 안에 다른 사람에게 집을 임대한 집주인은 불가피한 이유가 없었다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1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세입자 A 씨가 집주인 B 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A 씨는 2020년 7월 B 씨와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아파트를 보증금 6억6000만원에 2년간 임차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A 씨는 계약 만료를 앞둔 2022년 5월 계약갱신 의사를 밝혔지만, B 씨는 자신이 직접 살겠다며 갱신을 거절했다. 이에 A 씨는 계약기간이 끝난 뒤 아파트에서 나갔다.

B 씨는 같은 해 9월 아파트로 전입신고를 하고 이듬해 2월 한국에 입국해 2024년 4월까지 실제 거주했다.

그러나 B 씨는 2024년 2월 아파트를 제3자에게 보증금 8억2000만원에 2년간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A 씨의 계약이 정상적으로 갱신됐다면 임대차 기간이 끝났을 2024년 9월보다 약 7개월 앞선 시점이었다.

이에 A 씨는 B 씨가 정당한 사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아파트를 임대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대인이 자신이나 직계존속·직계비속의 실거주를 이유로 세입자의 계약갱신 요구를 거절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다만 계약이 갱신됐을 기간이 끝나기 전에 정당한 사유 없이 제3자에게 주택을 임대하면 기존 세입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고 있다.

B 씨는 다른 부동산의 세입자 6명이 한꺼번에 보증금 반환을 요구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아파트를 다시 임대했다고 주장했다.

B 씨와 남편이 공동 소유한 다가구주택의 세입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보증금은 총 6억9000만원이었지만, 새로운 세입자들에게 받은 보증금은 1억8000만원에 불과했다. B 씨는 소득이 없어 대출을 받기 어렵고 아파트를 매도하면 약 3억원의 양도소득세를 부담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1심은 B 씨의 주장을 받아들여 A 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전세사기 문제가 사회적으로 불거지면서 세입자 6명이 동시에 보증금 반환을 요구한 것은 계약갱신 거절 당시 예측하기 어려웠던 사정이고, 보증금 마련을 위한 재임대도 불가피했다고 판단했다.

2심은 판단을 뒤집고 B 씨에게 약 3079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심은 "다른 부동산의 임대차보증금 반환 의무는 B 씨가 A 씨의 계약갱신을 거절할 당시 이미 발생해 있었고, 2024년 2월께 반환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 봤다.

또한 "B 씨가 보증금 마련을 위한 여러 수단 가운데 아파트 재임대를 선택한 것일 뿐,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임대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2심은 B 씨가 A 씨에게 보증금을 시세인 10억원으로 맞춰주면 계약을 연장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점 등도 지적했다.

법에서 정한 보증금 증액 상한을 넘는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이 갱신 거절과 새로운 임대차계약 체결의 계기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실거주를 이유로 세입자의 계약갱신 요구를 거절한 집주인이 당초 계약이 갱신됐을 기간이 끝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집을 임대했다면,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기존 세입자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박헌우 기자

대법원도 원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정당한 사유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임대인이 갱신거절 당시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사정으로 제3자에게 목적 주택을 임대했어야 하고, 제3자에게 목적 주택을 임대하는 것이 불가피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같은 입증 책임은 임대인에게 있으며, B 씨가 주장한 보증금 반환 문제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실거주를 이유로 계약갱신을 거절한 임대인이 이후 다른 사람에게 주택을 임대했을 때 손해배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의 요건과 증명책임을 대법원이 처음으로 명확히 제시했다는 의미가 있다.

yes@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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