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막힌 韓 기업 해외 IPO…현대차·두산·LG전자도 타격받나


당국 '쪼개기 상장' 규제에 발 묶인 대기업 글로벌 영토 확장
자금 조달 골든타임 놓칠 우려도


SK하이닉스가 23일 미국 손자회사 솔리다임의 나스닥 상장 추진을 철회하면서 해외 IPO를 노리던 국내 대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박헌우 기자

[더팩트ㅣ이한림 기자] SK하이닉스의 미국 손자회사 솔리다임의 해외 증시 입성 불발이 금융당국의 중복상장 규제 강화 기조와 맞물려 모회사의 기업가치 훼손을 우려한 당국의 제동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된 가운데. 핵심 자회사들의 잠재적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 해외 자금 조달을 노리던 다른 대기업들도 투자 적기를 놓쳐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2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SK하이닉스는 시장 변동성과 주주가치 보호 등을 이유로 솔리다임의 나스닥 상장 검토를 중단한다고 공시했다. 중복상장을 경계하는 시장 우려가 커진 데다, 금융당국 수장들이 국정감사 등에서 해외 상장도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을 비껴갈 수 없음을 명확히 한 점 등이 원인이다. 실제로 SK하이닉스의 솔리다임 상장 철회는 발표 후 주가 급등으로 이어지면서 시장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금융당국의 중복상장 규제 명분은 알짜 자회사 쪼개기 상장 방지로 풀이된다. 과거 국내 대기업들이 핵심 사업부를 물적분할한 뒤 중복 상장하는 과정에서 모회사 일반 주주들의 지분 가치가 크게 희석돼 소액주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당국은 해외 상장 역시 자회사가 신주를 발행해 외부 자금을 유치하면 기존 모회사 주주에게 귀속되던 경제적 가치가 누수되는 본질은 같다고 판단하고,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이사회의 책임과 충실 의무를 엄격히 요구하고 나선 상태다.

다만 일각에서는 당국의 중복상장을 견제하는 엄격한 잣대가 글로벌 신사업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해외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던 다른 대기업들로 번질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자본시장에서는 현대차의 보스턴다이내믹스, 두산의 하이엑시엄, LG전자의 베어로보틱스 등 핵심 해외 자회사들이 직접적인 사정권에 들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먼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현대차다. 그룹의 미래 모빌리티 핵심축인 미국 로봇 자회사 '보스턴다이내믹스'는 현지 나스닥 상장을 통해 인공지능(AI)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 및 미국 공장 투입을 위한 대규모 자금을 확보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중복상장 심사 기준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 3곳(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이 투자법인을 통해 간접 지배하는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지분 구조상 국내 이사회의 주주 영향평가와 보호 방안 마련이 필수적이다. 적자가 지속된 와중에 이런 규제를 넘지 못해 상장이 지연된다면 미래 로봇 시장 선점을 위한 북미 현지 투자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두산의 수소연료전지 자회사 '하이엑시엄(옛 두산퓨얼셀아메리카)'은 재무적 리스크까지 겹친 상황이다. 하이엑시엄은 최근 외국계 증권사들을 대상으로 IPO 주관사 선정을 위한 입찰제안요청서(RFP)를 발송하는 등 나스닥 상장에 속도를 내왔다. 문제는 이 회사가 지난 2023년 전환우선주(CPS)를 발행해 약 1억6000만달러를 조달할 당시 재무적 투자자(FI)들과 4년 내 상장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만약 당국의 압박 등에 기한 내 증시 입성이 무산되면 FI들이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풋옵션(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어 자칫 두산 전반의 자금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실정이다.

LG전자가 미래 먹거리로 낙점한 미국 로봇 스타트업 '베어로보틱스' 역시 불똥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베어로보틱스는 향후 나스닥 상장을 염두에 두고 글로벌 투자사들을 대상으로 최대 4000억원 규모의 프리IPO(상장 전 투자유치)를 진행해 왔다. 다만 연이은 한국 기업들의 해외 중복상장 철회 분위기에 따라 몸값 산정 과정에서 불리한 조건을 취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들 3사는 반도체 호황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며 자체 투자 여력이 충분한 SK하이닉스와는 체급과 사정이 다른 점도 주목된다. 적자 상태에서 기술 개발과 시장 선점을 위해 대규모 외부 자금 유치가 필수적이나, 해외 상장 길이 막히면 재정적 부담을 모회사가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주주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운 당국 규제가 국내 모회사의 대규모 현금 유출을 유도해 주주가치를 더 갉아먹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자본시장의 신뢰 회복과 소액주주 권익 보호라는 가이드라인의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은 속도전인 만큼 기업들이 자금 조달 시기를 놓쳐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자회사의 취득 경로, 산업적 특성, 자금 조달 목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완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kuns@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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