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라인 은퇴설'보다 씁쓸한 것...태극마크의 무게를 잊었나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김민재·황희찬 침묵, 황인범 부인에도 커지는 '의혹'
국가대표는 실력뿐만 아니라, 태극마크를 향한 간절함을 품은 선수여야


황희찬(맨왼쪽)과 황인범(왼쪽 두번째)이 지난 6일 우즈베키스탄과의 평가전을 2-0으로 승리한 뒤 동료 선수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KFA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2026 북중미 월드컵을 준비하던 홍명보호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국대: 로드 투 노스아메리카’에는 유독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이 하나 있다.

‘국가대표.’ 과연 그 이름표를 스스로 내려놓는 은퇴는 언제쯤 가능한 것일까.

지난 월드컵은 ‘우리의 영웅’ 손흥민의 마지막 월드컵이 될지도 모른다는 절실함 속에 온 국민이 어느 때보다 좋은 성과를 갈망했던 대회였지만, 대표팀은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후유증과 내부 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급기야 선수단 내부의 파벌 갈등설까지 제기되더니, ‘96라인’인 황희찬·김민재·황인범의 동반 은퇴설마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황인범이 이를 공식 부인하긴 했으나 진위 여부를 명확히 확인하긴 어렵다. 하지만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불화설을 자극적으로 부풀리며 이슈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실관계를 완전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제 겨우 서른에 접어든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정말 이런 상태라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태극마크에 대한 이들의 열정이 겨우 그 정도였던 것인가 하는 씁쓸함이 먼저 앞선다. 이들 역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통해 병역 특례 혜택을 받은 선수들이다. 물론 이를 이유로 국가대표에 대한 무한한 봉사를 강요할 수는 없으며, 국가를 향한 헌신의 적정한 기준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금메달 직후 경솔한 언행으로 병역 특례 제도 폐지론까지 불러왔던 23세 이하 축구대표팀의 일부 어린 선수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과연 우리 축구선수들에게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남아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재성이 다큐멘터리 '국대: 로드 투 노스아메리카'에 출현해 국가대표 은퇴에 관해 자산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국대: 로드 투 노스아메리카'화면 촬영

다시 다큐멘터리 ‘국대’로 돌아가 보자.

"국가대표를 은퇴하겠다는 말을 내가 할 수… 해도 되나? 불러주지 않으면 은퇴가 자동적으로 되는 곳이잖아요. 여기가."

대표팀의 살림꾼이자 든든한 형님 역할을 해온 이재성의 말이다. 늘 차분한 표정과 작은 목소리로 팀을 받치는 그는 자신의 헌신을 내세우거나 자만하지 않는 겸손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언제든 대표팀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준비하는 그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태극마크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동갑내기 손흥민 역시 같은 프로그램에서 "은퇴를 뭐, 선택하고 그런 위치는 아니죠. 대표팀은 저보다 훨씬 위대한 곳인데"라며 비슷한 자세를 보여줬다.

대표팀 은퇴를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불리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 어쩌면 국가대표에게 필요한 가장 본질적인 태도인지도 모른다.

2일 베네수엘라전 후반 교체된 후 벤치에서 축구화를 벗어 던진 김민재(오른쪽)./뉴시스

서른 안팎의 주축 선수들에게서 벌써 은퇴 이야기가 나오고, 나아가 동반 은퇴설까지 흘러나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팬들의 입장에서는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간 이들이 쌓아온 헌신의 세월을 손흥민이나 이재성이 바친 시간과 비교해보더라도, 만약 실제로 은퇴를 논의한 것이라면 이들의 대표팀에 대한 책임감을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한 개인의 고민이 아니라 동기생 세 명의 동반 은퇴 논의라면, 대표팀을 상대로 일종의 실력 행사를 하는 것처럼 비쳐질 여지도 있다.

이 대목에서 태극마크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애정을 보여주는 또 한 명의 선수가 떠오른다. 피치 위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뛰는 전북 현대의 미드필더 이승우다. 그는 태극마크를 ‘은퇴할 때까지, 축구를 그만둘 때까지 평생의 꿈이자 목표’라고 부르며, 국가대표팀에서 다시 불러줄 그날을 위해 늘 그라운드에서 자신을 단련한다고 밝혀왔다. 지난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낙마하며 고개를 숙였고, 이번 모레노호 승선마저 또다시 무산됐지만 그는 침묵 속에서 다음 기회를 준비하고 있다.

국민들이 바라는 국가대표는 뛰어난 실력뿐만 아니라, 이처럼 태극마크를 향한 간절함을 품은 선수다. 그런 선수들이 적어도 자신의 기량을 온전히 그라운드에서 펼쳐 보일 기회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도 바로 여기에 있다.

황인범이 지난 5일 우즈베키스탄과의 A매치 평가전을 하루 앞두고 코리아풋볼센터에서 팀 훈련에 임하고 있다./천안=KFA

이번 은퇴설의 배경에 팀 내부의 누적된 불만이 존재한다면, 그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이 동반 은퇴설이 선수들의 실제 뜻이었다면, 이는 대표팀 내부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은 물론 태극마크의 의미와 가치를 되묻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디 이번 논란이 일부 언론의 성급한 보도와 추측이 만들어낸 해프닝에 불과했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황인범을 제외한 두 선수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은 채 출국길에 오르면서, 은퇴설을 둘러싼 온갖 추측은 더욱 커지고 있다. 침묵이 반드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아무런 설명도 없는 상황에서는 대표팀을 둘러싼 혼란만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사실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바로잡을 것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경솔한 처신이 있었다면 그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한 방향을 바라보며 대표팀을 추슬러야 한다.

한국 축구가 여전히 혼란과 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태극마크를 내려놓겠다는 무책임한 선택이 아니라, 아시안게임 금메달 이후 병역 문제를 둘러싼 경솔한 언행으로 물의를 빚었던 후배들에게 국가대표의 책임감과 자부심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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