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 신동’ 그 후 7년...양예빈에게만 물을 일인가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한국 육상의 ‘아픈 손가락’… 기록 부진 속에서도 이어가는 도전
유망주 발굴 이후의 성장 지원, 한국 육상이 풀어야 할 과제


계룡중 3학년 시절의 양예빈이 2019년7월29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펼쳐진 제40회 전국시도대항육상경기대회 여자 중학교 400m 결승에서 압도적인 질주를 펼치고 있다. 그는 이날 55초29를 기록하며, 여자중학교 부별기록(종전기록: 55초60, 1990년)을 29년 만에 경신했다. /대한육상연맹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육상은 스톱워치와 기록판에 찍힌 숫자로 경쟁하는 냉정한 세계다. 기록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경쟁에서 밀려나는 것이 트랙의 현실이다. 하지만 때로는 기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속도로 다시 달리는 주자의 발걸음이 그 어떤 메달보다 깊은 울림을 안겨주기도 한다.

기록의 관점에서 볼 때 양예빈(22·정선군청)은 여전히 과거의 기량을 되찾지 못한 선수다. 2019년 중학교 3학년 시절 400m에서 55초29를 기록하며 29년 만에 한국 중등부 기록을 갈아치우며 단숨에 한국육상의 ‘신드롬’으로 떠올랐던 화려한 과거는 지나간 전설이 되었고, 실업 무대에 들어선 지금 그의 전광판에는 1분대 안팎의 아쉬운 수치가 찍힌다. 10대 시절의 폭발적인 스피드는 사라졌고, 경기력은 정체되어 있다.

그러나 선수의 가치를 기록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최근 JTBC와의 인터뷰에서 양예빈은 남들과 비교하기보다 자신의 속도로 달리며 어제의 기록을 넘어서는 데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타인의 시선이나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겠다는 다짐이다. 한때 쏟아졌던 관심과 부상, 슬럼프의 시간을 지나 비로소 자신의 언어로 레이스를 정의하려는 모습이기도 하다.

올해 정선군청으로 이적한 양예빈이 이달초 JTBC와의 인터뷰에서 남들과 비교하기보다 자신의 속도대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밝히고 있다./ JTBC 유튜브 화면캡처

이 말이 대단한 반전이나 극적인 기량 회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55초대 기록을 되찾기까지는 갈 길이 멀고, 성인 무대의 경쟁은 냉혹하다. 불과 1년 전 KBS와의 인터뷰에서 "초등학교 때 기록과 비슷해 부끄럽다"고 털어놓았던 그는 이번에도 자신의 부진을 미화하거나 변명하려 들지 않았다. 부상과 슬럼프, 성적 저하를 돌아보면서도 외부환경을 탓하기보다 자신이 채워나갔어야 할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지금의 부끄러운 기록도 결국 나를 나타내는 지표"라며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시 운동화 끈을 매는 그의 모습은 한 유망주의 부진을 개인의 실패로만 바라봐도 되는지, 그 성장 과정을 뒷받침하는 육성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는지 되묻게 한다.

29년 만의 대형 유망주라며 환호하고 미디어의 집중 조명이 쏟아졌지만, 정작 신체 성장통과 발목 피로골절이라는 시련을 겪는 동안 어린 주자에게 필요했던 세심한 전담 지도와 과학적인 부상관리가 충분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시스템의 보호를 온전히 체감하지 못한 채 힘겨운 과도기를 통과해야 했던 그가, 무너진 성적 앞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다시 달리는 것 자체가 한국 스포츠의 유망주 육성 시스템이 안고 있는 씁쓸한 단면이다.

중학교 시절 양예빈이 2019년 7월29일 제40회 전국시도대항육상경기대회 여자중학교 400m결승에서 부별 신기록 수립한 뒤 트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대한육상연맹

지금 한국 여자 육상 트랙은 400m에서 23년 만의 한국신기록(53초 38)을 세운 창원시청 김서윤(23)을 비롯해, 100m 단거리의 ‘중학생 유망주’ 왕서윤(14·서울체중) 등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하며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는 이들의 성장은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육상의 미래를 새로운 유망주의 등장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옆에서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 채, 화려했던 왕관을 내려놓고 무거운 현실을 짊어진 채 달리는 양예빈 역시, 유망주를 어떻게 키우고 성장의 굴곡을 어떻게 뒷받침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자산이다.

양예빈이 예전의 기량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성인 무대에서 끝내 과거의 최고 기록을 넘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의 기록에 쫓기기보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레이스를 이어가는 그의 모습은 한국 체육계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유망주의 부진을 한 개인의 실패나 안타까운 예외로 치부하고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굴곡을 통해 유망주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시스템의 한계를 돌아볼 것인가. 양예빈의 기록은 단순히 과거의 성취와 현재의 성적을 비교하는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유망주를 발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인 무대에서도 가능성을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는 한국 육상의 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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