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의 가치①] 듣지도 않는데…1억 장 팔리는 CD의 역설

감상에서 소장 그리고 이제 경험하는 머치 앨범으로 앨범 구매하는 이유를 더 다양화하는 흐름방탄소년단, 스트레이 키즈, 코르티스, 에이티즈(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의 앨범은 수백만 장씩 팔린다. 이들을 비롯해 K팝 앨범은 연간 판매량 1억 장에 달한다. /각 소속사음악을 담던 앨범은 팬심을 담는 상품이 됐고, 그 이면에는 과잉 소비와 환경 문제도 쌓였다. 이제 앨범은 키링과 이어폰, 운동화가 돼 팬들의 일상으로 들어오고 있다. 단순히 형태만 달라진 걸까, 그 안에 담긴 가치도 달라진 걸까. 듣는 앨범에서 소장하는 앨범을 넘어 사용하는 앨범으로 진화하는 현재를 들여다보고 미래의 가능성을 짚어봤다. <편집자 주>[더팩트 | 정병근 기자] 음악을 듣기 위해 앨범을 구매하던 시대는 지났다. 스트리밍 플랫폼과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면서 CD의 역할은 크게 줄었다. 그럼에도 K팝 시장에서 실물 앨범은 여전히 중요한 상품이다. 한 가수의 앨범이 수백만 장씩 팔리는 일이 낯설지 않고 K팝 앨범 연간 판매량은 1억 장에 달한다.듣지도 않는데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앨범. 음악 감상이라는 본래의 기능은 희미해졌지만,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오히려 커진 앨범의 역설이다.음반 판매량 집계 플랫폼인 한터차트에 따르면 2017년 1379만 장이었던 연간 피지컬 앨범 판매량은 2019년 1857만 장으로 증가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졌다. 공연이 중단되면서 팬들의 소비가 앨범으로 집중된 데다 K팝의 글로벌 영향력까지 확대되면서다. 그 결과 2023년 1억 장을 돌파했다.다만 폭발적인 성장은 영원하지 않았다. 2024년 8695만 장, 2025년 8624만 장으로 판매량이 2년 연속 감소했다. 2026년 상반기에는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대형 아티스트들의 활약과 신인들의 성장 등에 힘입어 4953만 장으로 역대 상반기 최고 판매량을 기록하며 반등했다.최근 몇 년의 흐름을 보면 분명 정체기가 있었지만, 시장의 성장 동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흐름은 끝없이 증가할 것처럼 보였던 음반 판매량에도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도 보여준다. 특히 음반 산업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음악을 듣는 행위와 앨범을 구매하는 행위 사이의 거리를 점점 벌려놨다.그 중심에는 K팝 특유의 팬덤 소비문화가 있다.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이 담긴 포토북과 포토카드는 음악 못지않게 중요한 구매 요인이다. 앨범마다 서로 다른 구성품을 제공하거나 포토카드를 무작위로 넣는 판매 방식은 여러 버전을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하나의 앨범을 내면서 그 버전을 10종 이하로 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정도다.팬사인회와 영상통화 이벤트도 빼놓을 수 없다. 응모를 위해 앨범을 구매하는 구조에서는 당첨 확률을 높이고자 같은 앨범을 수십 장 이상 구매하는 일도 벌어진다. 여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초동(발매 후 일주일간의 판매량) 기록과 음악방송 성적을 높여주기 위한 구매까지 더해진다.사실상 팬들에게 앨범은 단순한 음악 상품 이상의 의미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티스트의 성장에 기여하고 그 성과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만족감, 한정판 구성품을 모으는 즐거움, 같은 팬덤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이 구매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복합적인 변화지만, 듣는 앨범에서 소장하는 앨범의 영역으로 넘어왔다고 볼 수 있다.앨범은 감상에서 소장으로 그리고 이제 직접 경험하는 형태로 다양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9월 열린 '2026 더팩트 뮤직 어워즈'에서 출연 가수들이 단체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기사 내용과 무관. /남윤호 기자문제는 소비가 집중되는 대상이 앨범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특정 구성품이나 구매에 따른 혜택일 때 발생한다는 점이다. 포토카드 등을 제외한 나머지 구성품이나 CD는 보관만 하거나 중고로 처분하는 경우가 생긴다. 대량 구매한 앨범이 버려지면서 환경 문제도 불거졌다.환경단체 케이팝포플래닛(Kpop4Planet)은 2024년부터 불필요한 음반 구매를 유도하는 마케팅을 줄일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기획사들 역시 재생 용지를 사용하거나 포장을 간소화하고, CD 대신 QR코드나 근거리 무선통신(NFC)을 통해 음악을 감상하는 플랫폼 앨범 등을 내놓기도 했다.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기존의 구매 구조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CD가 사라져도 포토카드 수집이나 팬사인회 응모를 위해 동일한 상품을 여러 개 구매한다면 과잉 소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더라도 필요 이상의 앨범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구조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그렇다고 실물 앨범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CD로 음악을 감상하거나 LP 특유의 음질과 물성을 즐기는 수요는 여전히 존재한다. 앨범을 소장하며 음악과 아티스트를 기억하려는 팬들의 욕구 역시 디지털 음원만으로는 충족하기 어렵다.결국 K팝 산업이 마주한 과제는 실물 앨범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팬들이 앨범을 구매하는 이유를 더욱 다양하게 만드는 데 있다. 단순히 판매량을 늘리는 것을 넘어 구매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상품이 필요하다. 이는 최근 경험을 중시하는 세대의 니즈와 맞물려 변화를 부채질한다.최근 키링과 이어폰, MP3 플레이어 등 실용적인 상품을 앨범과 결합한 머치(MERCH) 앨범이 주목받는 배경이다. 음반과 굿즈(MD)의 경계를 허물어 음악이 앨범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다양한 상품이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구조다. 팬들은 앨범을 책장에 꽂아두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에서 착용하거나 사용할 수 있다.엔믹스의 MP3 플레이어 앨범, 킥플립의 카메라 앨범 등을 내놓으며 머치 앨범의 영역을 꾸준히 확장해 온 JYP엔터테인먼트의 관계자는 "음악 시장의 질적 향상과 그에 준하는 소비자의 뛰어난 소비 수준이 뮤직 비즈니스 형태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바라봤다.CD에 굿즈를 결합한 형태인 머치 앨범이 다양해지고 있다. 아일릿은 미니 3집 'bomb' 발매 당시 인이어 이어폰 머치 버전(사진)을 출시했다. 평소 K팝을 즐겨듣는 30대 여성 A 씨는 이때 아일릿의 앨범을 처음 구매했다. /빌리프랩걸그룹 아일릿(ILLIT)은 지난해 6월 미니 3집 'bomb(밤)'를 발매하면서 인이어 이어폰 머치 버전도 출시했다. 평소 K팝을 즐겨듣는 30대 여성 A 씨는 이때 아일릿의 앨범을 처음 구매했고 인이어 이어폰을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A 씨는 "아일릿 노래를 좋아하지만 앨범까지는 구매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예쁜 인이어 이어폰이 있어서 지난해 처음으로 앨범을 구매하게 됐다"며 "출퇴근길이나 운동할 때 이어폰을 잘 사용하고 있고 특히 인이어 형태로 돼있어서 귀에서 잘 빠지지 않아 아주 유용하다"고 말했다.머치 앨범은 가치와 실용 외에도 시장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시도다. K팝은 팬덤을 바탕으로 음반과 음원, 공연, 굿즈 등 다양한 영역에서 수익을 창출해 왔다. 그중 굿즈는 최근 몇 년간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머치 앨범은 음반과 굿즈의 장점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상품이다. 정체 상태인 앨범 시장의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다.특히 아티스트의 콘셉트와 상품의 기능을 결합하면 음악을 소비하는 경험도 확장할 수 있다. 앨범의 세계관을 반영한 키링이나 인형은 캐릭터 상품이 되고, 가수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어폰과 MP3 플레이어는 음악을 즐기는 도구가 된다. 패션 브랜드와 협업한 파우치나 운동화는 일상에서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2024년부터 머치 앨범을 다양화하고 있는 SM엔터테인먼트의 크리에이티브 2센터 크리에이티브 비주얼의 김욱 총괄 디렉터, 조우식, 조수연, 이지홍은 "앨범을 소장하는 것 자체가 아티스트를 향한 애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 됐다"며 "이런 변화 속에서 아티스트의 음악과 콘셉트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활용할 수 있는 앨범의 형태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렇다고 머치 앨범이 기존 CD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 디지털 음원이 보편화된 상황에서도 음악을 물리적인 매체로 소장하고 감상하려는 욕구는 계속 존재한다. 오히려 최근에는 LP에 대한 수요가 늘고 CD 플레이어를 특별한 앨범 구성품으로 제작하는 등 음악을 직접 재생하는 경험을 새롭게 소비하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머치 앨범이 여러 버전에 하나를 추가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다만 음악을 담아 판매하던 앨범이 음악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경험까지 판매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계속><관련 기사>[앨범의 가치②] 키링·이어폰에 운동화까지…사용하며 즐기는 음악[앨범의 가치③] MP3·운동화·괄사 세라믹 어떻게 탄생했나[앨범의 가치④] 팬심 넘어 상품성으로…진화는 계속된다kafka@tf.co.kr[연예부 | ssent@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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