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사에서 나홍진이라는 이름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추격자'(2008)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황해'(2010), '곡성'(2016), 그리고 올해 2026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베일을 벗은 '호프(HOPE)'에 이르기까지, 그는 익숙한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을 서늘한 긴장감과 불길함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마스터클래스 현장에서 나홍진 감독이 직접 풀어놓은 80여 분간의 고백은, 그가 화면 위에 구축해온 기괴하고 치밀한 미학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보여줬다.

나 감독이 지닌 특유의 감각적 리듬과 미장센은 유년 시절의 환경과 깊게 맞물려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미스터리·스릴러 소설을 사 오며 자연스럽게 장르 문학을 접했던 그는, 일 때문에 일본을 자주 오가던 아버지 덕에 유치원도 가기 전부터 카세트 워크맨을 들고 다니며 음악을 들었다. 동네 형들에게 워크맨을 뺏기고 또다시 선물 받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리듬과 음악은 그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음에도 순수 미술이 아닌 공예과로 진학해 목공, 금속, 도자, 염색 등을 배운 경험 역시 인상적이다. 유치원 시절 전시회를 앞두고 교사가 자신의 그림에 손을 대며 강제로 선을 그리게 한 사건 이후 평면 그림에 흥미를 잃었던 그는, 평면의 지루함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질감과 재질(Texture)을 탐구하기 위해 공예를 택했다. 이 시기 체화한 입체적 감각과 질감에 대한 집착은 훗날 그가 영화 현장에서 공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미장센을 구축하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특히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부모님의 허락 아래 자연스럽게 술과 담배를 접하며 경계 없는 자유로움을 누렸다.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 7시에 곧바로 학교로 등교하는 일상이 반복될 정도로 통제받지 않는 유년·청년기를 보냈다. 이러한 자유로운 환경은 훗날 그가 거부감이나 주저함 없이 세상의 온갖 다양한 환경과 인물들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강력한 바탕이 됐다.
대학 시절과 군대를 거쳐 서른 살에 이르기까지, 나 감독은 가리지 않고 갈 수 있는 모든 장소를 찾아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타인이 꺼리는 음지와 우범지대조래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으며 사람들과 어울렸던 그가 이 과정에서 깨달은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은 하루에도 수없이 사실이 아니거나 왜곡된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는 점이었다.
왜곡된 말들을 악의 없이 내뱉는 인간의 본성을 목격하며 그는 심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 밀실에서 단둘이 5분간 대화를 나누고 나와도 서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복기하는 현상을 보며, 그는 애초에 '단 하나의 진실(Absolute Truth)'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집단에 소속될 때마다 느껴지는 이 근원적인 불안과 상대의 의중을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이야말로 훗날 그의 모든 시나리오를 관통하는 핵심 동력이 됐다.
그는 관념 속에서 소재를 찾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여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추격자'는 동네 술집에서 형사들과 밤새 술을 마시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기수대장의 두 눈을 찌르고 탈출했던 당시의 충격적인 비화를 들으며 시작됐다. '황해'는 하루에도 몇 건씩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가리봉동 무법지대를 취재한 뒤 연변으로 건너가 실제 조직폭력배를 만나며 구체화됐다. '곡성' 역시 무속인의 가족과 인연이 닿아 산속 한자에서 수개월간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세계관과 불길함을 몸으로 익힌 결과물이었다.
시나리오 작업에서 인물이 2명, 3명 늘어나며 인간관계가 거미줄처럼 복잡해질 때, 나 감독은 이를 억지로 정리하거나 단순화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관객마저 이 복잡한 거미줄 안으로 함께 넣어버리자"는 파격적인 선택을 내린다.

이 거미줄 구조에 결정적인 촉매제로 작용하는 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불길함'이다. 2017년 한반도 정세 악화와 전쟁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 느꼈던 극도의 불길함이 영화 '호프'의 출발점이 되었듯, 그는 직관적인 불길함을 포착했을 때 비로소 펜을 든다. 정체나 진실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의 거짓말과 사회적 불길함이 결합할 때 관객은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며 답을 구하게 되고, 영화는 관객을 몰입시키는 강력한 동력을 얻는다. 나 감독은 관객이 답을 찾기 위해 화면에 집착하게 만들면서도 끝내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지 않음으로써 안타고니스트의 막강한 존재감과 압도적인 리얼리티를 유지한다.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나 감독은 창작자로서의 자아를 버리고 기술적 통제관인 '영화 감독' 모드로 완전히 전환한다. 이 단계에서 그가 가장 중시하는 요소는 단연 '공간'이다. 스태프와 장비가 현장에 투입되기 전, 그는 배우들을 아무도 없는 촬영 공간으로 미리 초대해 공간의 질감과 기운을 온전히 느끼게 한다. 공간이 이해되어야 비로소 카메라의 앵글과 사이즈, 배우의 배치가 정확하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철저한 사전 계획이 영화의 유연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을 경계하는 그는 '곡성' 촬영 당시 스토리보드를 스태프와 공유하지도, 스스로 보지도 않은 채 현장에서 빛과 공간, 인물에만 집중하며 자유롭게 카메라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감독으로서 가장 사활을 거는 순간은 단연 후반 작업(Post-Production)이다. 나 감독은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프리·프로덕션과 프로덕션을 진행한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는 포스트 프로덕션을 위해서"라고 단언할 만큼 후반 작업에 모든 것을 건다. 이 시기를 거치며 영화가 원래의 계획을 뛰어넘어 행운처럼 '괴물 같은 완성작'으로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후반 작업에 쫓기면 사냥꾼에서 사냥감이 되는 처지로 전락한다는 철학 아래, 그는 후반 작업 시간 확보에 타협 없는 집념을 보인다.
마스터클래스 말미, 자신을 어떤 장르로 정의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나 감독은 "가까이서 보면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유형의 이상한 사람일 것"이라는 솔직한 답변을 남겼다. 인위적인 메모나 기억의 노력 대신, 오직 자신의 무의식을 거쳐 '육화(肉化)'된 진실의 재료만을 영화적 언어로 선택한다는 나홍진.
불행의 원인을 개인의 자책으로 돌리지 말라는 나름의 위로를 '곡성'의 기저에 깔아두면서도, 관객을 서늘한 불길함과 거짓의 거미줄 속으로 끌어들이는 그의 세계관은 결국 인간을 향한 깊은 불안과 끊임없는 현장 탐구에서 비롯된 정교한 예술의 결실이다.
iMBC연예 김경희 | 사진 고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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